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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영받지 못하지만 떠날 수도 없어"…10년째 '골목 노숙' 윤애복씨

LA 한인타운의 한글 간판들은 한인들에게 민족적 동질감을 안겨준다. 한인 노숙자에게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8가와 사우스 카탈리나 스트리트 인근 한 골목에는 윤애복(65) 씨가 맨바닥을 매트리스 삼아 살고 있다. 햇빛조차 제대로 들지 않는 외진 골목이 그녀의 거처다. 골목으로 들어서자 악취가 코를 찌른다. 페트병, 폐지, 버려진 가구 등이 곳곳에 널브러져 있다. 대변 때문에 걸음을 떼는 것조차 조심스럽다. 역설적이지만 이 골목은 그녀가 가장 편안함을 느끼는 공간이다.       주변 업주들에 따르면 윤 씨는 이곳에서 10여 년째 살고 있다. LA시의 노숙자 담당 공무원들이 윤 씨에게 셸터로 이주할 것을 제안했다. 이들은 캐런 배스 LA 시장이 주도하고 있는 ‘인사이드 세이프’ 프로그램을 수행 중이다.노숙자들을 셸터나 모텔 등으로 옮기는 게 이들의 역할이다.   한 공무원이 윤 씨에게 “임시 거주지로 옮기겠느냐”고 물었다. 윤 씨는 잠시 고민하다가 느릿한 말투로 “들어가고 싶다. 그런데 이미 여섯 번이나 들어갔다가 다시 나왔다”고 대답했다.   유창하진 않았지만 윤 씨는 어느 정도 영어로 의사를 표현했다. 이 공무원은 좀 더 원활한 소통을 위해 “한국어 통역이 필요하느냐”고 되물었다.    곧바로 한국어 통역사와 연결됐다. 공무원은 통역사를 통해 다시 한번 셸터로 입소할 의향이 있는지 재차 확인했다. 윤 씨가 한국어로 “들어가겠다”고 답변하자, 그곳에 있던 다섯 명의 공무원들이 곧바로 윤 씨의 옷과 소지품 등을 두 개의 큰 비닐봉지에 담기 시작했다. 모텔로 옮기기 위한 준비였다.   윤씨가 갑자기 자신이 옮기게 될 셸터의 위치를 물었다. 한 공무원이 “이곳에서 6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윤 씨가 격앙된 목소리로 “그곳으로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마음이 돌변한 윤 씨를 보며 공무원들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래도 재차 모텔로 가자고 설득했지만 그럴수록 윤 씨는 더 완고하게 제안을 거부했다.   노숙자가 원하지 않으면 강제로 이주시킬 수 없다. 시정부 규정 때문이다. 윤 씨는 쓰레기 가득한 그 골목길에 다시 혼자 남아야 했다.   취재팀은 조심스럽게 “왜 모텔로 들어가지 않느냐. 6마일이 너무 멀어서 그러느냐”라고 물었다. 윤 씨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난 여기가 좋다. 다른 곳은 싫다”고 했다.   공무원뿐만이 아니다. 윤 씨가 다른 곳으로 가길 원하는 이들은 또 있다. 골목길 인근의 업주들은 윤 씨가 이곳에 있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미용실을 운영하는 한인 업주는 취재팀에 “윤 씨가 제발 다른 곳으로 갔으면 좋겠다”고 하소연했다. 이 업주는 “윤 씨가 아무 데나 대소변을 보니까 악취가 진동하고, 손님들도 너무 불편해한다”고 했다.     윤 씨에 대해 이야기하던 이 업주는 화가 난 듯 문을 열고 나가더니 갑자기 소리치기 시작했다. 이 업주는 윤 씨를 향해 “제발 여기를 떠나. 죽더라도 여기서 죽지 말고 다른 데 가서 죽어”라며 냉혹한 말을 계속해서 내뱉었다.   하지만 윤 씨의 표정엔 아무런 변화가 없다. 고개를 숙인 채 길바닥만 응시하고 있다. 윤 씨 앞에는 한참 전 누군가가 전해준 듯 차갑게 식은 국수 한 그릇이 놓여 있었다.   윤 씨는 가장 익숙하다고 느끼는 골목이지만 정작 이 곳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중식당을 운영하는 박은경 씨는 “가끔 윤 씨가 보이지 않을 때도 있지만, 항상 이곳으로 다시 온다”며 “노숙자들은 한 번 정착한 곳을 집처럼 생각하는지, 떠나도 다시 돌아오는 것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물론 냉정 이면에는 인정도 공존한다. 일종의 연민이다. 박 씨는 “나도 솔직히 윤 씨가 너무 싫지만 그래도 몇 번 윤 씨에게 음식을 전해준 적도 있다”며 “손님 중에는 식사를 한 뒤, 음식을 따로 투고해서 윤 씨에게 가져다주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어느 비 오는 날 저녁, 중년의 한인 남성이 윤 씨에게 다가와 식사를 했는지 물었다. 온종일 굶었던 윤 씨는 따뜻한 떡국이 먹고 싶다고 했다. 이 남성은 윤 씨에게 20달러짜리 지폐 한장을 건넸다. 윤 씨는 그 돈을 들고 식당 문 앞에서 서성였다. 순간 종업원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지폐를 건넸던 남성이 윤씨 대신 “떡국을 투고해달라”고 부탁하자 종업원은 그제야 주문을 받았다. 10분 정도 후 다시 문밖으로 나온 이 종업원은 “좀 넉넉하게 담았다”며 윤 씨에게 음식을 건넸다.   떡국을 받아 든 윤 씨는 그 자리에서 한국어 무가지를 찾아 바닥에 깔았다. 단순히 음식 받침 용도는 아니다. 음식을 먹던 그녀가 갑자기 신문에 적힌 날짜를 가리키면서 요일을 물었다. 윤 씨에게 한국어 신문은 한인타운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일종의 연결고리다.   윤 씨는 배척 속에서도 안도감을 느끼는 아이러니 속에 살아가고 있다. 한인타운 외진 골목에 숨겨진 현실이다.       [이 기사는 미주중앙일보의 영어 매체 코리아데일리US(www.koreadailyus.com)에 12월 20일 게재된 기사를 한글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장열·김영남·김상진 기자한인홈리스시리즈 한국어 통역사 골목길 인근 한인 노숙자

2024-12-26

“우리는 6피트 땅 밑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LA 한인타운의 한 평온한 주택가에는 냉혹한 현실이 숨겨져 있다. 아이롤로 스트리트와 11가 인근, 하얀 목조 주택 뒤로 수북이 쌓인 물건들은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암묵적으로 전하고 있다.     꽃무늬 셔츠와 야구 모자를 쓴 노숙자 전명오(65) 씨는 자신만의 보물 창고를 갖고 있다. 그곳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그는 흥분한 듯한 목소리로 선글라스 하나를 보여줬다. 전 씨는 “이게 얼마짜리로 보이나. 400~500불 정도 될 것”이라며 “누가 훔친 물건인데 내가 산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만의 보물 창고에 쌓여 있는 물건들을 우리에게 자랑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는 “방금 좋은 자전거가 하나 들어왔는데 관심이 있느냐”고 묻기도 했다.   자전거, 전기 스쿠터, 골프채, 고급 여행 가방 등이 여기저기 쌓여 있다. 비싼 물건만 있는 건 아니다. 그릇, 빈 술병, 낡은 소파 등 잡동사니도 널브러져 있다.     전 씨의 보물 창고가 있는 이곳은 한 한인이 소유한 주택이다. 시정부의 지원을 받아 노숙자 셸터로 운영되고 있다. 이곳엔 전 씨와 같은 노숙자가 20여 명이 살고 있다. 전 씨는 “이 물건들은 모두 파는 것”이라며 “훔친 물건들이라서 팔 수 있는 곳이 없으니까 여기서 구매자를 찾아주는데, 일종의 암시장 같은 곳”이라고 했다.   그는 1975년에 미국에 왔다. 영어 구사에 큰 불편함이 없어 보였다. 전 씨는 자신을 포함해 이곳의 노숙자 모두를 “6피트 아래에 놓여있는 사람들”이라고 지칭했다. ‘6피트’는 사람이 묻힐 때 관이 놓이는 깊이다. 노숙자들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인생의 바닥에 놓여 있다는 의미다.   인터뷰를 하면서 셸터의 내부 사진을 찍으려 하자 갑자기 민머리의 한인 남성이 화가 잔뜩 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그는 “지금 뭐 하는 거냐. 사진을 왜 찍는 거냐”고 화를 냈다. 그러자 전 씨가 곧바로 막아서면서 “내 사진을 찍는 거니까 걱정하지 마”라고 말했다.   당장 덤빌 듯 화를 냈던 이 남성은 전 씨의 말 한마디에 조용히 셸터로 들어갔다. 전 씨는 이곳에서 나름 ‘실세’인 듯했다. 전 씨가 갑자기 왼쪽 팔을 들어 흉터를 보여줬다. 그는 “한인타운의 갱단이 이렇게 한 것”이라며 “길거리에 살면서 여러 번 칼에 찔렸다”고 했다.     전 씨에게 한인타운은 모순적인 곳이다. 그는 이곳에서 자신의 보물들을 찾기도 하지만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애를 써야 하는 곳이기도 하다. 마당에 널린 장물들을 우리에게 자랑하던 그는 한인타운 치안의 현주소와 노숙자들이 겪는 실질적인 어려움들에 대해서는 비판을 하기도 했다.     전 씨는 “경찰은 싸움이 나도 우리가 노숙자인 것을 알면 그냥 가버린다”며 “어떤 일이 벌어져도 개입하지 않으려 하고 노숙자를 제대로 보호하지도 않기 때문에 노숙자들은 더 비인간적으로 변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또 “베벌리힐스 같은 동네는 돈이 많으니까 신고하면 경찰도 바로 오고 통제가 되는데 한인타운은 그렇지 않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현실은 역설적으로 그가 한인타운을 떠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전 씨는 “특히 한인들은 한인 노숙자가 길거리에서 흉기 같은 걸 들고 있어도 쫓아내거나 신고하지 않는다”며 “아무래도 같은 민족이니까 연민 같은 감정을 갖는 것인데, 그래서 우리가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전 씨는 노숙자가 되기 전 핸디맨으로 일했다. 그가 노숙자로 전락한 건 6년 전 일이다. 마약에 손을 대면서 그의 인생도 ‘6피트’ 밑으로 떨어졌다. 그는 수년간 거리와 셸터를 오간 경험을 토대로 현재 시정부 노숙자 정책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전 씨는 “소셜 워커들이 이곳을 가끔 방문하는데 정리가 잘된 거실만 보고 간다”며 “진짜 우리가 사는 모습은 제대로 살펴보지 않으니까 현실과 동떨어진 결정을 내린다”고 말했다.   전 씨에게 한인타운은 비참한 보물섬과 같다. 영원히 떠나지 못하고 갇혀 있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 반복되고 있다.   [이 기사는 미주중앙일보의 영어 매체 코리아데일리US(www.koreadailyus.com)에 12월 20일 게재된 기사를 한글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취재 = 장열·김영남 기자 사진= 김상진 기자한인홈리스시리즈 전명호 한인 노숙자 la 한인타운 보물 창고

2024-12-25

[중앙칼럼] 또 다른 ‘이강원’…늘 우리 주변에 있다

LA한인타운의 한글 간판들은 한인에게 민족적 동질감을 안겨준다. 한인 노숙자에게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8가와 사우스 카탈리나 스트리트 인근 한 골목에는 윤애복(65) 씨가 맨 바닥을 매트리스 삼아 살고 있다.     햇빛조차 제대로 들지 않는 외진 골목이 그녀의 거주지다. 악취가 가득하다. 페트병, 폐지, 버린 가구 등이 곳곳에 널브러져 있다. 대변 때문에 걸음을 떼는 것조차 조심스럽다. 역설적이지만 이 골목은 그녀가 가장 편안함을 느끼는 공간이다.   LA시 공무원들은 몇 번이나 셸터 이주를 권유했다.   한번은 윤 씨가 공무원들에게 이주할 의사를 밝혔다. 공무원들은 그 말에 즉시 그녀의 옷과 소지품을 챙겼다. 멍하게 있던 윤 씨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내가 옮기게 될 셸터가 어디에 있죠?”   “여기서 6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있어요.”   그녀는 갑자기 격앙된 목소리로 거절 의사를 밝혔다. 노숙자가 원하지 않으면 강제로 이주시킬 수 없다. 시정부 규정 때문이다. 윤 씨는 쓰레기 가득한 그 골목길에 다시 혼자 남아야 했다.   답답한 마음에 왜 가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냥 여기가 좋아요. 다른 곳은 싫어요.”   쓰레기가 널려 있고 악취가 나는 골목인데도 그곳을 벗어나는 게 싫은 듯했다. 언어와 문화 차이로 인한 이질감 때문일까. 타인종이 많은 한인타운 밖으로 나가는 건 두려움이다.   가장 익숙하다고 느끼는 그 골목에서 정작 그녀는 누구도 반기지 않는 존재다. 주변 업주들의 불만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업주 입장에서 노숙자는 껄끄러운 이방인이다.   참을 만큼 참았는지 한 업주가 소리쳤다.   “제발 여기를 떠나. 죽더라도 여기서 죽지 말고 다른 데 가서 죽어.”   무정한 말을 듣고도 그녀의 표정엔 아무런 변화가 없다. 고개만 숙인 채 길바닥만 응시하고 있다. 하루이틀 일이 아닐 터다.   냉정 이면에는 인정이 공존한다. 일종의 연민이다. 한인 문화의 특성이 그렇다.   식당을 찾았다가 윤 씨를 보고 음식을 따로 투고해서 가져다주는 이들도 있다. 인근 업주들은 쫓아내고 싶지만, 한편으론 마지못해 돕는다. 더러 주머니 속 잔돈도 건네준다.   11월의 LA 바람은 제법 차다. 길을 가던 중년의 한인 남성이 물었다.   “저녁 식사했어요?”   세 끼를 챙겨 먹을 리가 없다. 윤 씨는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한 채 웅얼거렸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그녀는 떡국이 먹고 싶다고 했다. 이 남성은 지갑에서 20달러짜리 지폐 한 장을 꺼냈다. 인근 식당에서 떡국을 투고해서 건넸다. 식당 주인도 노숙자가 먹을 음식이라 좀 더 넉넉하게 담았다고 했다.   떡국을 받아 든 그녀는 한국어 무가지를 찾아 바닥에 깔았다. 단순히 음식 받침 용도는 아니다. 음식을 먹던 그녀가 갑자기 신문에 적힌 날짜를 가리키면서 요일을 물었다. 하루하루 길거리에서 생존하느라 시간을 인지할 여유조차 없는 게 분명하다.   윤 씨 주변엔 늘 한국어로 된 무가지가 있다. 한인타운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연결고리일지도 모른다.   본지가 현재 영문 기사로 준비 중인 한인타운 노숙자 시리즈의 한 부분이다. 지난달 그 첫 번째 스토리로 노숙자 사역을 하다가 노숙자로 전락해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한 이강원 목사의 삶을 보도했다. 후속 취재를 통해 이 목사가 한인타운에 머물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살아있는 노숙자들의 삶을 통해 찾고 있다.   한인타운은 노숙자들에겐 역설이 반복되는 곳이다. 그들은 심적, 정서적, 문화적으로 안도감을 느끼는 동시에 배척 당하고 소외되고 있다. 상반된 감정이 뒤섞인 공간에 놓여있는 셈이다.    이 목사도 그렇게 살다가 끝내 노숙자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채 죽어야 했다. 이는 또 다른 ‘이강원’이 우리 주변에서 언제라도 숨을 거둘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그래야 해결책도, 대안도 고민할 수 있다. 길거리를 찾아다니며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 이유다. 장열 / 사회부장중앙칼럼 이강원 한인타운 노숙자 한인 노숙자 이강원 목사

2024-12-17

온정 버무린 김치, 노숙자들 눈물…한인 노숙자 쉼터 김치담그기

김치의 양념은 온정이다. 어머니들의 손맛에 노숙자들은 눈물을 보였다.   21일 김요한 신부가 운영하는 한인 노숙자 쉼터에서 진행된 김장 행사의 한 장면이다. 이날 김치를 담그기 위해 9명의 재미 어머니 봉사회(회장 티나 이) 회원들은 오전 10시에 모여 약 4시간 동안 분주하게 움직였다.   티나 이 회장은 “치아가 좋지 않은 분들을 위해 부드러운 풋배추와 열무를 사용했다”며 “오늘은 6박스, 약 16통 정도의 김치를 만들었다”고 전했다. 이어 “김치를 담그는 일은 힘들지만, 맛있다고 해줄 때 큰 보람을 느낀다”고 덧붙였다.   한 봉사자는 “고향의 맛을 느꼈으면 좋겠다”며 “김치 담가본 지 오래됐지만, 엄마의 손맛을 기억하면서 김치를 버무렸다”고 말했다.   쉼터에서 생활 중인 한성현 씨는 현재 암 투병 중이다.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은 상태다. 한 씨는 “사람들이 많이 와서 대화도 나누고 맛있는 음식도 먹을 수 있어서 우울하지 않고 살아 숨 쉬는 기분”이라며 “이런 자리가 매달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인터뷰중 한 씨는 행복하다면서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이날 행사는 동네 잔치였다. 김치뿐만 아니라 된장찌개, 해물파전, 돼지고기 수육, 묵은지 등 다양한 음식들이 마련돼 마을 잔치처럼 따뜻한 분위기가 펼쳐졌다.   재미 어머니 봉사회는 활동을 시작한 지 30년째다. 한인 노숙자 쉼터 봉사는 벌써 20년 동안 이어지고 있다.   매년 3~4차례 김치를 담가 노숙자 쉼터에 전달하고 있다. 김치 외에도 통조림, 김, 계란 등 쉼터에 필요한 밑반찬도 꾸준히 기부하고 있다. 봉사 기금은 일일 식당 운영과 개인 기부 등으로 마련된다.   쉼터를 운영 중인 김 신부는 “쉼터는 항상 생필품이 부족하다. 한인들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다”며 “오늘 김치와 물품을 전달받아 힘이 난다”고 말했다.   김 신부가 운영하는 한인 노숙자 쉼터는 65세 이상, 주거지 없이 2개월 이상 길거리 생활을 해온 이들을 수용하고 있다. 쉼터에는 현재 20여 명의 한인 노숙자가 산다. 대부분 몸이 아픈 환자들이다. 김 신부는 이들과 함께 생활하며, 쉼터의 모든 관리와 운영을 맡고 있다.   한인 노숙자 쉼터는 한인타운 인근(2251 W 21st St)에 있다. 도움을 주고자 하는 이들은 전화(323-244-8810)로 연락할 수 있다. 한편, 22일(오늘)은 ‘김치의 날’이다. 김치의 전통과 건강상의 장점을 기리기 위해 가주 정부가 공식 지정한 날이다. 정윤재 기자노숙자 한인 김치 노숙자들 노숙자 쉼터 한인 노숙자

2024-11-21

또 한인 노숙자 사망…텐트 안에는 라면 두봉지

LA한인타운 노상에서 또 한명이 사그라들었다. 21가 인근에서 노숙자 셸터를 운영하는 김요한 신부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길거리에서 살아가던 안태홍(65)씨가 지난 18일 밤 숨을 거뒀다는 전화였다.     지난 9일 사망한 한인 노숙자 피터 최(34)씨 이후 들려온 또 다른 비보다. 〈본지 4월 12일자 A-3면〉   LA는 봄 기운이 완연하다. 잿빛 길바닥은 여전히 차갑다. 그 괴리는 좁혀지지 않는 LA의 만성 문제다. 노숙자들에게 현실은 여전히 희망이 없다.    안씨가 죽었다는 길거리로 직접 나가봤다. 그곳에서 한인 노숙자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19일 오전 10시 50분, 올림픽 길과 세인트 앤드루스 교차로 북서쪽 코너다.     이곳은 LA한인타운의 작은 스키드로다. 한인 노숙자 10여명이 텐트를 치고 몰려 산다.   안씨도 그중 한명이었다.   도로를 지나가는 차들의 소리는 시끄럽다. 길거리의 사람이었던 안씨의 죽음은 그 소리에 묻히고 있다.   안씨가 살던 텐트 안을 살펴봤다. 작은 전구 하나만 달랑 달려있다. 라면 봉지 두 개가 눈에 띈다. 핏자국이 흥건하다. 냉랭한 텐트 안은 생전 안씨의 삶을 대변한다.   노숙자들도 감정이 있다. 옆 텐트의 노숙자에게 안씨의 사망 소식을 아는지 물었다.   노숙자 박준씨는 “어젯밤이었다. 텐트를 열었는데 안씨가 엎드린 채 죽어있더라”며 “김요한 신부에게 사망 사실을 알렸고, 김 신부가 현장으로 직접 와서 보고 신고를 했다”고 말했다.   박씨는 뉴욕에서 사업가로 활동했다. 위험한 길거리에서 산지는 1년째다. 그의 한쪽 눈은 벌겋게 퉁퉁 부어있었다. 사연을 들어봤다.    그는 “한인타운 맨해튼 플레이스 인근에서 텐트에서 자고 있을 때 갑자기 한 남성이 들어와 총을 쐈다”며 “그때 사건으로 눈 하나를 실명했다”고 했다.   노숙자도 자리싸움을 한다. 타인종 노숙자들로부터 텃세에 시달리기도 한다. 한인 노숙자들이 한인타운으로 몰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안씨의 삶은 곧 길거리 사람들의 인생이다. 안씨의 사망 소식은 그들에게도 슬픔이다.   안씨의 사연을 묻는 기자 질문에 다른 노숙자들은 “말할 기분이 아니다”라며 인터뷰를 거절했다.   김 신부도 텐트를 찾았다. 안씨가 눈을 감은 그 자리에 성경 한권을 두고 향을 피웠다. 연고가 없으니 김 신부라도 망자를 챙겨야 했다. 그는 “조만간 셸터에서 장례식을 조촐하게라도 열어줄 계획”이라고 했다.   김 신부는 전화기에 있던 동영상 하나를 보여줬다.   “열심히 살고, 열심히 돈 벌어 어려운 사람을 위해 살겠다.”   생전 안씨의 밝은 모습이었다. 안씨는 그렇게 살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다. 그는 순복음기도원과 은혜기도원에서 봉사까지 할 정도로 인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단, 냉랭한 현실은 의지를 계속 꺾었다.     안씨 뿐만 아니다. 한 블록을 더 걸어가 봤다. 중앙루터교회 앞이다. 또 다른 노숙자인 이강원 씨를 만났다.   그는 과거 아가페 홈미션을 운영했던 사역자였다. 노숙자를 챙겨주던 이가 노숙자가 된 셈이다.   이씨는 아가페 홈미션을 운영하며 언론에도 수차례 소개될 정도로 활발하게 활동했던 인물이다.   이씨가 작은 유리 파이프에 힘겹게 불을 붙이고 있다. 가까이 가서 보니 담배는 아니다. 물어보니 마약류를 흡입 중이라고 했다.   그의 몸은 앙상하다. 옷도 제대로 걸치지 않았다. 말도 횡설수설이다. 길거리에서의 삶이 얼마나 황폐한 지 짐작이 된다.   치아는 거의 다 부식됐다. 말투는 어눌하다. 이씨는 “길거리로 나온 지 5년이 넘었다”며 “기부금도 줄어들어서 아가페 홈미션을 운영하는 게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이곳에는 남성 노숙자만 있는 게 아니다. 이씨는 “한인 여성 두 명도 이 근처에 살고 있다”고 했다.   그는 더는 대화를 이어가는 걸 원하지 않았다. 그리곤 멍한 눈으로 작은 유리 파이프에 입을 댔다.    맑은 하늘이 무색하다. LA한인타운 노숙자들의 삶이다.   LA한인타운=김경준 기자무더위 노숙자 본래 한인노숙자쉼터 한인 노숙자 노숙자 텐트촌

2024-04-21

한인들, 무연고 사망 한인노숙자 28일 장례

노숙자로 지내다 사망한 70대 한인 여성<본지 2월 24일자 1면 보도>의 장례가 시카고 한인들의 정성으로 오는 28일 엄수된다. 장례는 디그니티 장의사(Dignity Memorial) 이효섭 장의사가 절차를 맡았으며 시카고한인제일연합감리교회(김광태 목사)가 릿지우드공원묘지에 있는 교회묘지를 기증했다. 또 한인이 운영하는 Unidex가 후원업체로 참여했다. 환송 및 하관 예배는 시카고한인교회협의회(회장 최문선 목사)가 맡는 등 시카고 한인 교계를 중심으로 한인들이 뜻을 모았다. 이효섭 장의사는 26일 전화통화에서 “어제(25일) 시신을 모셔왔다”며 “우리(한인사회)가 힘을 쓰지 않았다면 고인은 낙엽처럼 쓸려 사라져 버릴 뻔했다”고 말했다. 그는 “다 같은 한인으로 가족을 보내듯이 보내드리면 좋겠다”며 “아픔을 안고 쓰러진 심령에 동포들의 사랑이 채워지길 바란다. 홈리스의 장례가 아닌 우리 가족의 장례처럼 동포들이 상실의 슬픔을 나누며 관 위에 놓는 꽃이 많았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미국명 Ho Pun Padgett로 밝혀진 김 모씨는 미군과 결혼한 뒤 남편을 따라 시카고로 온 뒤 곧 남편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뒤 정신질환에 시달린 것으로 전해졌다. 이후 노숙자로 전락했으며 시카고에는 김 씨의 남동생 또는 오빠가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끝내 고인을 찾지 않았다. 김 씨는 그동안 ‘생년월일: 3-4-1941, 사망일자: 2-17-2014 9:42am, 사망지: University Of Chicago’라는 이름표가 붙여진 채 무연고자로 쿡카운티 검시소에 안치돼 있었다. 김 씨에 대한 장례는 데스플레인의 에이럴(Oehler) 장의사(2099 Miner St.)에서 거행된다. 환송예배는 28일(금) 오후 3~6시, 환송예배는 29일(토) 오전 10시 릿지우드 공원묘지에서 엄수된다. 임명환 기자

2014-03-26

사망 한인 노숙자 장례 후원

노숙자로 지내다 사망한 70대 한인 여성과 관련<본지 24일자 1면 보도> 디그니티 장의사(Dignity Memorial) 이효섭 장의사가 장례식 후원을 약속했다. 이효섭(사진) 장의사는 14일 본지에 전화를 걸어와 “이민자 모두 좀 더 잘 살기 위해 아메리칸드림을 가지고 미국에 왔다”며 “그러나 이민 생활이 누구에게나 호락호락 하지는 않다. 그 분의 삶도 마찬가지로 안타깝다. 우선 장례를 책임지고 돕겠다. 도울 수 있으면 한인 동포 모두 마음을 모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길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김 모(미국명 Ho Pun Padgett)씨는 지인에 따르면 미군과 결혼한 뒤 남편을 따라 시카고로 온 뒤 곧 남편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뒤 정신질환까지 앓았다. 이후 노숙자로 전락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씨의 지인에 따르면 시카고에 김 씨의 남동생 또는 오빠가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 연락이 닿지 않고 있다. 이에 따라 김 씨의 시신이 안치된 쿡카운티 검시소 측은 곧 무연고자로 처리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 장의사는 “사망자에 대한 법적 절차가 끝날 동안 연고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김 씨는 장례 절차도 없이 공동묘지에 묻히고 만다”며 “모든 사람의 인생, 삶이 마지막에 덧없이 쓰러지면 안된다. 죽음도 존엄성이 있어야 한다. 돌아가신 분의 존엄성을 지켜주고 싶다. 동포들과 종교계가 함께 나섰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 장의사는 “검시소에 곧 연락을 취해 김 씨의 장례절차를 밟을 것”이라며 “릿지우드 묘지 등 편안한 곳에 모시려고 한다. 그 분의 마지막 가는 길에 한인 몇 분이라도 모여 그 분의 명복을 빌어줬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한편 사망한 김 씨가 1998년 시카고에서 발급받은 여권에 따르면 1941년 3월 4일생으로 한국에서 출생했다. 임명환 기자

2014-03-14

길에서 숨진 70대 한인 노숙자

시카고에서 노숙자로 지내던 70대 한인 여성이 숨졌지만 가족과 연락이 닿질 않아 안타까움을 사고 있다. 지난달 17일 시카고에서 한인 여성 김 모(미국명 Ho Pun Padgett)씨가 숨졌다. 김 씨는 노숙자로 오랫동안 살아왔고 최근에는 시카고 다운타운 인근의 쉘터에서 지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김 씨는 미군과 결혼, 시카고로 이민왔지만 곧 남편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으며 정신질환에도 시달렸다. 이후 노숙자로 전락했고 한인들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나마 김 씨의 사연이 알려지게 된 것은 그의 친구가 한인에게 이같은 소식을 전달하면서다. 김 씨는 노인아파트로 거처를 옮기자는 주위의 권유에도 한사코 미루다가 길에서 심장마비로 숨을 거둔 것으로 전해졌다. 김 씨와 알고 지내던 한인 권 모 씨는 12일 본지와의 전화통화에서 현재 김 씨의 가족을 찾고 있다고 밝혔다. 권 씨는 “시카고에 김 씨의 남동생 혹은 오빠가 거주하고 있다고 들었다. 다른 가족들과는 연락이 닿질 않아 시신 인수가 불가능하다”며 “현재 김 씨의 시신은 쿡카운티 검시소에 안치돼 있으며 얼마 있지 않으면 검시소측에서 무연고자로 처리할 것이라고 들었다. 그전에 가족을 찾아 장례식이라도 치르고자 한다”고 말했다. 한편 본지가 입주한 김 씨의 미국 여권에 따르면 김 씨는 1941년 3월 4일생으로 출생국가는 한국으로 되어 있다. 여권은 1998년 시카고에서 발급받은 것으로 나와 있다. 박춘호 기자 [email protected]

2014-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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